달빛과 함께 하는 지식한냥

일반상식 모음/사회, 문화 지식 한냥

서울 지명의 유래 모음(왕십리, 망우리고개, 청량리, 재동, 도화동)

달빛독서 2024. 11. 7. 03:23
반응형

왕십리

태조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창건 후 수도를 옮기는 것을 추진했습니다.

​처음에는 계룡산으로 정하고 그곳을 새 수도로 정했습니다.

​하지만 도읍지 이전 공사가 약 10개월 정도 진행 중일 때 반대하는 사람이 나왔습니다.

​조정의 중신들이 반대하였는데 그 이유는 '도읍이란 나라의 가운데에 있어야 하는데 계룡산은 너무 남쪽에 치우쳐 있고 지세가 너무 좁고 토지가 푹 꺼졌으니 풍수지리상 쇠약과 패망을 가져오는 자리'라고 반대했기 때문입니다.

​이런 신하들이 반대에 이성계는 공사를 중지하고 한양으로 천도하기를 결정하고 무학대사에게 궁궐터를 지을 자리를 알아봐 달라고 부탁했습니다.

​그렇게 왕에게 부탁받은 무학대사는 지금의 왕십리 근처에서 지형을 살펴보고 있을 때였습니다.

​그런데 근처에 농사를 짓고 있는 노인이 소에게 "워이~~ 이런 멍청하고 미련한 무학 같은 놈아. 어째서 바른 곳을 두고 굽은 곳으로 가냐?"

​이 소리를 들은 무학대사는 그 농부가 범상치 않은 노인임을 깨닫고 좋은 궁궐터가 있으면 알려달라고 부탁했습니다.

그러자 그 노인은 무학대사에게 "여기서 북서쪽으로 십 리만 더 가보시오"라고 했습니다.

노인의 말대로 10리를 더 가보자 명당을 발견했고 그곳이 지금의 경복궁 자리입니다.

​명당자리를 발견한 무학대사는 그 자리를 알려준 노인에게 인사를 하러 왔던 길을 되돌아갔지만 이미 그 노인은 없었고 어떤 절간이 있어 찾아 들어가 보니 그 절간 안에는 그 노인의 초상화가 걸려있었습니다.

​그 노인은 신라 말기 풍수도참설의 대가였던 '도선국사'라는 스님이었습니다.

​그리고 그 노인이 처음 십 리를 가라고 가르쳐 준 곳을 왕십리(갈 왕往 열 십十 마을 리里)라고 부르기 시작했습니다.

망우리고개

서울 중량구 망우동과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사이에 있는 고개입니다.

 

태조 이성계가 자신이 묻힐 명당을 찾고 있었습니다.

​어느 날 동구릉의 건원릉 터를 찾았고 흡족한 마음으로 환궁하는 길에 이 고개 위에서 쉬게 되었는데 오랜 근심을 잊게 되었다고 하여 그 이후부터는 망우리(잊은 망忘 근심한 우憂 마을 리里) 고개라고 불러왔습니다.

​지금은 망우동이 되었습니다.

반응형

 

청량리

청량리는 원래 '청량사'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.

​이 절은 푸른 숲과  맑은 물이 흐르고 늘 청량한 바람이 불어 청량이라는 이름이 붙게 됐다고 합니다.

​지금의 청량사는 고종 때 재건축되었으며 일제강점기 때 우국지사, 고승들이 즐겨 찾던 곳이라고 합니다.

 

 

재동

재동은 '계유정난'때 만들어진 지명입니다.

​'계유정난'이란 수양대군과 그 심복들이 단종의 왕위를 빼앗고, 단종을 보필하던 황보인 등 중신들을 참살한 사건입니다.

​이 사건으로 흘린 피가 내를 이루고 피비린내가 천지를 진동하자 사람들이 집안에 있던 재를 가지고 나와서 길을 덮었다고 합니다.

​이렇게 온 동네에 재가 뿌려지자 '잿골'이라 불리다 한자로 회동(灰洞)이 되었다가 오늘날 재동(齋洞)이라 불리게 되었습니다.

압구정

압구정이란 조선 세조 때 한명회의 호인 '압구'을 따서 붙인 이름의 정자를 말합니다.

​압구정의 압구는 친할 압(狎) 자와 갈매기 구(鷗) 자를 씁니다.

​즉, 벼슬을 버리고 강촌에 살면서 갈매기와 친하게 지낸다는 뜻이지만 정작 한명회는 그러한 삶을 살지 못했습니다.

 

반응형

 

도화동(마포구)

옛날 한 노인에게 예쁜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은 마음이 착하고 효심이 지극했다고 합니다.

​이 딸에 대한 소문은 옥황상제의 귀에까지 들어갔는데 옥황상제는 자기 며느리로 삼고 싶어 했습니다.

​자기의 딸이 옥황상제의 며느리가 된다는 말에 노인은 무척 기뻤지만 또 마음 한구석으로는 딸과 이별해야 하는 슬픔으로 가슴이 미어졌습니다.

​이윽고, 옥황상제는 노인의 딸을 며느리고 데려갔고 노인에게는 천도복숭아를 선물로 주었습니다.

​그 복숭아를 먹으면 천년을 살수 있다고 합니다.

​하지만 노인은 차마 딸과 바꾼 그 복숭아를 먹지 못하고 울기만 했습니다.

​결국 복숭아는 썩어서 씨만 남고 노인은 그 씨를 땅에다 정성껏 심었습니다.

​이듬해 그곳에 싹이 트더니 나중에는 나무가 되었습니다.

​시간이 흘러 노인은 죽었지만 그 일대는 복숭아나무의 숲이 되었는데 이때부터 이곳을 도화동(복숭아 도桃 꽃 화花 마을 동洞)이라고 불렀습니다.

반응형